조선이 전기를 처음 도입한 시점은 대한제국 수립 이전인 1887년 무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 근대화의 상징으로 전차와 가로등을 떠올리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외교적 협상과 내부 권력 구조의 충돌, 그리고 민중의 반발이 존재했다. 특히 한성전기회사의 설립은 단순한 기술 수입이 아니라, 조선 정부의 자주권과 외세 의존 사이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본 글에서는 조선이 왜,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전기를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갈등과 저항이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조선에 전기가 처음 도입된 배경
1880년대 후반, 조선 정부는 개화파를 중심으로 근대 문물의 수용을 본격화했다. 특히 미국과의 수교 이후, 전신과 전기 기술의 수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전기는 당시 조선의 지배층에게는 단지 기술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외세에 의한 의존이냐, 자주적 기술 확보냐를 두고 조정 내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일부 관리들은 전기가 '도깨비불'이라며 국민의 혼을 빼앗을 수 있다고 믿었고, 다른 이들은 외세 침투의 통로가 될 것을 우려했다.
한성전기회사의 설립과 외세 개입
1898년, 한성전기회사는 미국인 콜브란(Colbran)과 보스트윅(Bostwick)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경성(서울)에 전차를 도입하고, 가로등을 설치하며, 전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 설립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뚜렷한 기술적 기반 없이 주요 인프라의 통제권을 외국인에게 넘겼고, 이는 자주권 침해 논란으로 번졌다. 특히 재정 고갈을 이유로 서울 전차 사업권까지 넘긴 것은 당시에도 큰 비판을 받았다.
전기 도입에 대한 조선 사회의 반응
| 사회 계층 | 반응 | 주요 이유 |
|---|---|---|
| 양반 지식인 | 기술 수입 자체는 찬성, 외국인 독점에 반대 | 자주권 침해 우려, 토착 기술 부재 |
| 서민층 | 불신과 공포감, 요금 부담에 반감 | '불을 돈 주고 쓴다'는 개념에 대한 생소함 |
| 개화파 관료 | 근대화 상징으로 적극 수용 | 개혁 성과 과시, 외세와의 협력 중시 |
전기 도입이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
한성전기회사를 통해 공급된 전기는 서울에 최초로 가로등을 점등하게 만들었고, 이는 개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전기 요금, 설치 비용, 사용 규제 등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전기 전선이 사람의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소문이 돌았고, 아이가 아플 때마다 전신주를 부수는 사례도 보고되었다. 기술과 인식의 간극은 조선 사회의 변화 속도와 그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결론: 전기 도입은 조선 근대화의 상징이자 모순이었다
조선의 전기 도입은 단순한 기술 수입이 아니라,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마주한 내적 모순과 외적 압박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성전기회사의 설립은 외세 의존을 통한 개혁의 양면성을 드러냈고, 민중과 지식인들의 불신은 조선이 자주적 근대화를 준비하지 못했음을 상징했다. 결국 전기는 조선이 꿈꾸던 새로운 질서의 빛이자, 스스로 만든 그림자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