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 사회는 극심한 교육 불평등 속에 놓여 있었다. 일본은 조선인을 위한 공식 교육을 제한적으로만 허용했고, 대부분의 조선 민중은 글을 읽고 쓰는 것조차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0년대 전국 각지에서는 스스로 배움을 실천하려는 야학(夜學) 운동이 전개되었다. 야학은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글을 배우는 교육 공간이었으며, 자발적인 지식인들과 청년 운동가들이 강사로 참여했다. 본 글에서는 당시 조선 민중이 어떻게 문해(文解)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바꾸려 했는지, 그리고 왜 이 운동이 일제의 감시와 탄압 대상이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야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
1910년대 말 조선인들의 교육 기회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일본은 식민 통치의 정당화를 위해 '보통학교'를 일부 설립했지만, 실제론 일본어 중심 교육과 황국 신민화가 핵심이었다. 조선 민중은 문자 해득이 곧 생존의 수단이자,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점을 깨달으며 자생적 교육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야학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민중 주도의 문해 운동이었다.
야학의 운영 방식과 주요 특징
야학은 대부분 마을 창고, 농촌 교회, 혹은 한옥을 개조한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강사들은 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청년 지식인, 교사 출신 실직자, 혹은 종교계 인사들이었고, 학생은 농민, 여성, 어린이, 하층 노동자까지 다양했다. 수업은 한글 읽기, 셈하기, 역사와 민족의식 고취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교과서 대신 직접 만든 유인물이 사용되었다.
당시 야학의 전국적 확산과 수치
| 연도 | 야학 수 | 주요 지역 |
|---|---|---|
| 1920년 | 약 100여 곳 | 경성, 개성, 평양 |
| 1923년 | 약 350여 곳 | 전라북도, 충청도, 함경도 |
| 1926년 | 500곳 이상 | 전국 도시 및 농촌 |
일제가 야학을 탄압한 이유
일본 제국주의는 처음에는 야학을 단순한 문해 운동으로 간주했지만, 이후 민족주의와 연결된 사상 교육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강력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1920년대 중반부터는 야학 강사와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동조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일본은 야학 운영자들을 '치안유지법'으로 체포하거나 야학 자체를 강제 폐쇄했다. 이는 식민권력이 글을 가르치는 행위조차도 위협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야학의 교육 내용과 민중의 변화
야학을 통해 글을 읽고 쓰게 된 민중은 자신들의 권리를 인식하게 되었고, 노동조합 결성이나 소작 쟁의, 농민운동 등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단순한 문자 해득을 넘어서, 자각과 조직화의 시작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특히 여성과 아동의 참여가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이는 단지 교육 운동이 아닌 사회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결론: 야학은 침묵하던 조선 민중의 첫 번째 목소리였다
야학은 조선 민중이 단순히 ‘배우고 싶다’는 욕망을 넘어서, 식민 권력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세우는 투쟁의 도구였다. 글을 안다는 것은 단지 책을 읽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꿀 수 있다는 자각의 시작이었다. 일제는 이 작은 배움의 불빛을 두려워했고, 그만큼 야학은 조선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민중 교육 운동 중 하나로 평가된다. 오늘날에도 ‘야학’이라는 이름은, 억압 속에서도 지식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