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평양에는 중앙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지방에서 조용히 학문을 닦았던 유학자들이 존재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후손이나 지역 기록에서만 언급되어 왔기에, 그 사상이나 활동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 당대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소규모 교육 공동체를 이끌기도 했다. 김득련은 그중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사례다. 그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고, 서원 설립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제자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글은 주변 문인들과 교류를 통해 전해졌고, 후대에 “조용한 성현”으로 불렸다. 본문에서는 김득련이라는 인물의 배경과 활동, 그리고 그가 왜 교육을 확장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고찰한다.
김득련의 출신과 학문적 배경
김득련은 1811년 평양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출생했다. 그는 서얼도 양반도 아니었기에 관직 진출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어려서부터 독학에 가까운 방식으로 성리학과 실학을 공부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목수였지만, 그는 유년 시절부터 책을 구해 읽었고, 20대에는 장서를 보유한 몇 안 되는 지방 사가로 알려졌다. 그는 퇴계 이황보다는 율곡 이이를 따랐으며, 실용적 윤리와 가족 중심의 교육철학을 강조했다.
그가 제자를 받지 않은 이유
김득련은 주변 이웃들이 자녀를 맡기기를 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식으로 제자를 받지 않았다. 그는 “배움은 스스로의 질문에서 시작되며, 가르침은 그 질문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일반적인 유교 교육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었으며, 오히려 자율학습과 사색 중심의 공부를 지향했던 셈이다. 그는 편지와 시문을 통해 간접적인 가르침만 제공했다.
김득련의 주요 활동과 교류 인물
그는 평양 근방의 무명 문인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작은 지식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김득련의 글은 당시 군관이던 이진상에게 전달되었고, 이후 ‘진보적 선비’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는 직접 저술한 문집은 없었지만, 이진상의 기록에 다수의 시문과 평론이 인용되어 전해진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방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퍼뜨린 인물이었다.
김득련 사상 요약 비교표
| 항목 | 일반 유학자 | 김득련 |
|---|---|---|
| 교육 방식 | 서당, 제자 양성 | 자율 학습, 서신 교육 |
| 사상적 성향 | 성리학 중심 | 성리학 + 실학 혼합 |
| 관직 여부 | 과거 응시 후 출사 | 과거 거부, 은둔 |
| 사회적 평가 | 향촌 유지, 서원 설립자 | 조용한 성현, 사상가 |
현대 교육에 주는 메시지
김득련의 사례는 오늘날 교육 방식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다.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답을 주입하는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그의 철학은 디지털 시대의 자기주도 학습, 비형식 교육과도 닮아 있다. 교육의 중심이 ‘전달’에서 ‘자각’으로 옮겨가야 함을, 19세기 지방의 무명 유학자가 이미 보여주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