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대당 외교 전략과 국제적 위상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기반으로 성립된 국가였지만, 주변 강대국들과의 외교에서 능동적이고 전략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당나라와의 관계는 발해 외교의 핵심 축으로, 단순한 조공 외교가 아니라 주도적이고 교차적인 협력과 견제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발해는 국력을 과시하며 당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추구했고, 때로는 유연한 태도로 외교적 이득을 취하기도 했다. 본문에서는 발해가 대당 외교를 어떻게 설계했는지, 그 전략의 배경과 효과는 무엇이었는지를 다룬다. 특히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발해가 어떤 위상을 가졌는지 살펴보며, 조선이나 고려와는 다른 외교 노선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왜 당나라와의 외교가 중요했는가?

발해는 국가 성립 초기부터 중국 대륙과의 외교를 매우 중시했다. 그 중심에는 당나라가 있었다. 당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문명국이었으며, 주변 국가들은 대부분 당과의 외교를 통해 자신들의 정통성과 위신을 높이려 했다. 발해 역시 고구려 계승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당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필요했다. 또한 당과의 안정적인 관계는 일본이나 신라와의 갈등 속에서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발해의 외교 전략: 조공과 실리의 이중 기조

발해는 외형상 조공 외교를 택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자주성과 국력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조공 사절은 대부분 정기적으로 파견되었고, 그 횟수와 규모에서 발해는 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활발한 교류국이었다. 그러나 발해는 단지 조공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고, 외교를 통해 당의 책봉을 받되, 내부 자치를 완전히 보장받는 실리 중심의 전략을 취했다. 발해 왕실은 스스로를 '천손(天孫)'이라 부르며, 당나라 황제에 버금가는 위상을 자국 내에서 유지하였다.

발해의 대당 외교 연표

연도 외교 사절 파견 특징 및 목적
713년 고왕 대조영의 사절 파견 국가 승인 요청 및 조공 시작
732년 무왕 시기 외교 단절 당-흑수말갈 동맹 견제 차원
742년 외교 재개, 사절 파견 무역 재개와 정치적 유화
794년 문왕 시기 당과의 관계 정점 ‘해동성국’ 위상 확보

외교를 통한 국제 위상 확보

발해는 단지 당나라에만 집중하지 않고, 일본과의 외교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당과의 관계가 악화될 때에는 일본과의 교류를 강화함으로써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였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군사 국가가 아니라, 고도의 외교 전략을 구사하는 문명 국가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일본은 발해를 '대조선국(大朝鮮國)'으로 부르며 일정한 외교적 예우를 갖추었고, 이는 발해가 국제적으로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되었음을 방증한다.

결론: 발해 외교는 강대국 사이의 생존 전략이었다

발해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당나라를 상대로도 자주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며 외교를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실리 외교와 조공 외교의 균형을 유지하며, 국력을 국제적으로 과시했다. 발해의 대당 외교는 단지 책봉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외교 자체가 국가 생존과 발전의 핵심 전략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변방 국가가 아닌, 동아시아 질서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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